생각

말의 무게를 잃은 사회 2편 : 위로라는 이름의 침묵

델타위스키 2025. 4. 14.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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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 요약

위로는 개인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게 막는 도구로 기능한다.

진짜 위로는 감정을 덜어주는 것이지,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위로는 형식만 남은 의례다. 그 안엔 말도, 책임도 없다.

 

이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누군가 분노를 말하면, 돌아오는 말은 이렇다. “지금은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야.” “상처받은 사람에게 더 상처 주고 싶니?” “지금은 위로부터 해.”

이건 위로일까? 아니다. 이건 침묵을 권하는 명령이다. 지금의 위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황을 관리하려는 방식이다. 말하지 못하게 하고, 불편한 질문을 미루게 만든다.

 

위로는 사회가 만든 제도다

우리는 위로를 인간의 본능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학습된 태도다. ‘울면 달래줘야 한다’, ‘죽으면 조문해야 한다’, ‘실패하면 격려해야 한다’. 정해진 장면, 정해진 문장, 정해진 역할이 있다.

이 틀에서 벗어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위로하지 않으면 냉정하다 하고, 위로 방식이 다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로하는 ‘척’을 한다. 진심보다, 예의가 먼저다.

 

“힘내세요”는 왜 항상 등장하는가

사고, 죽음, 질병, 실직, 재난… 어떤 사건이든 붙는 말이 있다. “힘내세요.”

이 말은 짧고, 편리하고, 무해하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 책임도 없다. 무엇을 힘내라는 것인지, 왜 힘을 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은 도와주지 않는다. 그저 말한 사람을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 할 뿐이다. 그래서 모두가 사용한다. 안전하기 때문이다.

 

“위로가 먼저지”는 해석을 막는다

위로는 중요하다. 하지만 위로가 ‘먼저’라는 말이 반복되면, 그 뒤에 올 수 있는 해석과 질문은 점점 미뤄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어떤 구조가 반복을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지금은 이르다’는 이유로 사라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예 꺼낼 수 없는 것이 된다. 위로가 아니라, 회피다.

 

슬픔은 감정이고, 질문은 사유다

감정은 본능이고, 질문은 태도다. 누군가 아플 때, 감정을 느끼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정말 위로하고 싶다면, 울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원인을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라는 질문이 빠진 위로는 정지된 상태다. 감정을 앓고 끝나는 사회는 같은 고통을 반복한다.

 

진심이라는 말이 진심을 지운다

“진심으로 위로드립니다.” 이 문장은 방패다. 이 말을 앞세우면, 그 뒤에 어떤 질문도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진심은 선언이 아니라, 과정이다. 진심을 느낀다면, 듣고, 분석하고, 말해야 한다. 입으로 진심을 말하는 순간, 진심은 증명돼야 할 것이 되고, 증명되지 않으면 의심받는다. 그건 진심이 아니라 절차다.

 

슬픔을 동원해 논쟁을 닫는 방식

우리는 슬픔을 말 앞에 세운다. “고인을 생각해서라도…” “유가족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런 말들은 정지 신호다. 이 말을 꺼내면, 어떤 말도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슬픔의 정치학이다. 감정을 동원해 논쟁을 봉쇄한다. 정말 고인을 위한다면, 말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걸 말하지 않는 위로는, 자기 안심일 뿐이다.

 

위로가 감정을 덮는 방식이 아닌가

위로는 감정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가리는 도구가 되었다. 말하기 전에 위로하라고 하고, 말한 뒤엔 너무 날카롭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감정을 숨긴다.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하고, 상처를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

이건 위로가 아니다. 이건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말장치다. 진짜 위로는, 감정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그 감정이 어디서 나왔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함께 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위로 이후의 말을 꺼내야 한다. 울음 다음에 오는 것이 사유여야 한다면, 지금 필요한 건 위로보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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