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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는 어쩌다 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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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야전공병단
-부소대장
-비무장지대 불모지작전 지뢰제거팀
-위험성폭발물개척팀장
-육군비행장 복구 토공 담당

1군사령부
-XX정보분석관
-XX분석반장 직무대리
-사단사령부 XX분석관
-합동참모본부 민통선 지뢰지대 측량 사업
-군사령부 작전지역 지형가시화 측량 사업
-군사령부 관, 군 전술도로 측량 사업
-사단사령부 재난지역 지형가시화 구축 사업


교육 과정으로는
지뢰과정(육군공병학교)

폭파과정(육군공병학교)

위험성폭발물처리 팀장과정(육군공병학교)

급조폭발물(특수전사령부 707특임대)

영상처리과정(육군공병학교)

등을 수료하였고
야공단에서 위험성 폭발물 및 급조폭발물 등
각종 교육을 전담하였다.
선발직에 지원하여
군사령부 소속으로 사단사령부에 배속되어
사단장을 직접지원하는 참모로 근무하였다.




입대 전부터 밀리터리 라이프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확실히 선을 그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총기 파츠나 군복 사모아서 병정놀이하며 군인 흉내나 내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단순히 우리나라의 Natioanl Defense 즉 국방에 관심이 있었던 것 뿐이었다.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그것이 내가 군복을 입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군필자들은 알다시피 우리나라 군대는 물질보다 정신력을 '특히' 강조했다.
우리 국방부는 예산이 다 어디갔나 싶을 정도로 만성적으로 물자가 부족했고
부족한 물질(의,식,주)을 감추기 위해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형태를 띄고 있었다.
21세기 최첨단 시대에 경제규모 10위권에 드는 대한민국의 군대가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정말 눈물겨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군의 훈련 양상도 매우 독특했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자면 혹한기훈련이 있다.
혹한기는 엄동설한을 맨몸으로 때우며 내한적응을 하는 훈련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실은 동계작전에 동원되는 모든 자산을 투입시켜 계절적 요인을 동계장비로 극복하는 훈련이다.
이열치열로 그냥 버티는 훈련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우리 국방부는 대체 보급품이 다 어디로 샜는지 전투원 개개인에게 지급될
방한장비조차 턱없이 부족해서 치장물자를 꺼내쓰는 판이었다.
치장물자도 부족해 개인이 사비를 털어 군장점에서 사다 쓰는 것은 예사였다.

나는 대침투훈련이 비일비재한 동부전선에 근무한 터라 정말 이가 갈리도록 보급품 부재에 시달렸다.
차단선 훈련이 시작되면 소지한 장비 외에 음식 말고는 추가보급이 없으니 한번 나갈 때 정말 만반에 준비를
하고 나가야했다. 한번 나가면 3~5일 정도를 그냥 산속에서 비트 파고 돌아다니면서 지냈다.
어떻게 보면 실전 부시크래프트가 따로 없었다. 없는 장비는 현지에서 다 조달해야 했다.
Y지가대가 없으면 나무를 깎아서 총기를 받쳐야 했고 배터리가 떨어지면 태양광으로 배터리로 충전해야 했다.
산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위치를 못 찾아 식사 추진마저 놓치기 일수였다.
밤에 서리가 내리면 가지고 온 모포로 몸을 감싸고 비가 내리면 판초우의로 몸을 덮어야 했다.
판초가 워낙 폐급이라 물이 다 스며들어왔다.
신형 야상은 말만 발수기능이 있지 실제로 내수압이 매우 약해 장대비가 쏟아지면 그냥 다 젖어들어왔다.
판초가 뚫려도 야상만이라도 버텼으면 이렇게 힘들진 않을텐데...
군대 보급품 중에 제 기능을 하는게 과연 뭐가 있는 의문이 들정도였다.
이때마다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군대 보급이 나를 못 챙겨주기 때문에 내가 먼저 나를 챙겨야겠다고.
그래서 늘 나만의 장비를 두둑히 챙겨서 훈련에 임했다.

때가 흘러 사단 분석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재난상황에서 생존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사단 작전지역을 조사하러 다닐 때 실제 민통선 내부에서
길 안내를 맡은 간부가 숲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조난 위기의 상황을 겪었다.
민통선 내부에선 사방팔방 인적이 보이지 않으므로 육안으로 길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핸드폰도 통신지역이탈이면 GPS 어플이고 뭐고 다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깊은 숲속 나무 아래에서는 핸드폰이 안 잡힌다.
그래서 대낮이어도 산속에서 길을 잃는 곳이 민통선이다.
게다가 여긴 다니던 보급로 외엔 전부 다 미확인지뢰지대라 언제 뭐가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행이도 내가 업무 때 들고 다니던 GPS로 중간 중간 길목의 좌표를 표시하면서 들어왔는데
길을 잃어버리니 표시해둔 좌표로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때를 생각하면 정말 식은땀이 나고 오싹해진다.
민통선 안에서 실종되면 대체 누가 우릴 발견할까???
게다가 우리가 들어온 곳은 보급로도 아니고 그냥 미확인지뢰지대인데....
누가 여길 수색하러 들어온단 말인가??
이때 GPS 단말기가 없었다면 또 내가 좌표를 찍으며 들어오지 않았다면
과연 그 깊은 숲속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 의구심이 든다.
이때 나는 생각했었다.
깊은 산속에 들어 갈 때면 나침반을 반드시 챙겨 가야겠다고.
GPS 단말기가 배터리가 충분해서 그나마 사용이 가능했지만 시간이 장기화 되서
이것마저도 방전되었다면 대체 무엇으로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나침반 외에는 도무지 답이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군 생활내내 항상 불비한 여건에 스스로 전문적인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생존기술, 전술 장비, 택티컬, 아웃도어, 비박, 부시크래프트 등을 접하며
온몸으로 체득하고 배우기 시작했다.
군대에서 겪은 경험으로 장비와 생존기술이 왜그토록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계기였다.
정말 피땀 흘려 배운 교훈 때문인지 이 분야의 깊이 심취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이를 곱게 바라보진 않았다.
나의 행동들이 군의 시각에선 비전술적인 행동으로 비춰지는 것 같았다.
유난떨고 영화 찍냐는 둥 굉장히 별종 취급을 받기 일상이었다.

군대 내부에서 내 생각을 공유할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외부로 시선을 돌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또 있나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부시크래프트 등 생존 기술로 책도 낸 '김종도'란 분을 찾을 수 있었다.
현역 당시 코브라 파일럿이었다고 하는데 도피 탈출 등 각종 생환훈련을 계기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분이 쓴 글을 많이 읽어봤다.
정말 구구절절 머리가 끄덕이게 만드는 글이었다.
이분도 현역 시절에는 이런 관심 분야로 별종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늘 한결 같나보다.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분야로 누군가가 앞서 나가서
그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고 점치고 있는 걸 보니 나도 용기가 생겼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후회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밖에 나가서 이짓을 하다 빌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렇게 군인 같지도 않은 군인들과 대한민국의 내일을 함께 하며
병정놀이나 하며 허송세월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결단을 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역지원서를 작성하고 지휘관에게 보고 후 바로 제출했다.
원에 의해서 군 생활을 시작했고 원에 의해서 전역을 하겠다는데도 전역이 쉽지 않았다.
온갖 회유와 나가는 사람 붙잡는다고 더러운 소리를 다 해댔다.
나는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군대는 내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확고했기에..
그래서 전역할 때도 내가 무엇을 할건지 무슨 생각인지
그 누구에도 사실대로 말한 적이 없다.
그냥 대충 둘러대고 나왔다.
아까 말한 '김종도' 그분과 같은 맥락이었다.
말해봤자 좋은 소리 하나 못 들을게 뻔하기 때문에
굳이 대화 불가능한 인간들과 속내를 털어놓고 말을 주고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군복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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